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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망자
    카테고리 없음 2011. 5. 25. 17:37

    도망자

     

    (욥기 14:1 ~ 6)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 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 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까?

    하나도 없나이다. 그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음으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꾼같이 그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런 글 하나를 보았습니다.

    스위스에 사는 어느 노인인데, 자기 나이가 80세가 되었다고 소개하면서, 자기 인생 80년을

    수치로 이렇게 정리를 해놓았습니다.

     

    80평생에 잠을 잔 시간이 26년이었고, 일하는 데 든 시간이 21년이었고, 밥 먹는 데만 6년이 걸렸고, 남이 약속을 안 지켜서 기다린 시간만 5년. 아마도 약속을 굉장히 잘 안 지키는 사람들과 만났나 봅니다.

     

    그리고 수염 깎고 세수하는 데만 228일, 애들하고 놀아준 시간이 26일, 넥타이 매고 옷매무새 가다듬는데 18일, 담배 피우는 데 12일, 그리고 마음속에 가장 행복했다고 확신하는 시간이

    46시간이었다고 써놓았습니다.

     

    어떻게 계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며칠 동안의 일과를 시간으로 계산하여 평균을

    내고, 거기에다 80년을 곱해서 그 수치를 내놓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람 말이 오래는 살았지만, 행복했던 시간이 46시간, 그러니까

    2일이 채 못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했던 시간이 몇 시간, 아니면 몇 날 쯤 됩니까?

     

    수치로 계산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80평생을

    돌아보면서 인생무상을 많이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는 건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라고 하는 선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남들이 보기에도 잘못을 범한 일이 없고,

    동네 사람들한테도 칭송을 받았고, 하나님한테도 의인이라고 칭찬을 받는 사람으로

    서 큰 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 욥이라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놓고 여러 가지로 절규했는데,

    오늘 욥기 14장에서는 이런 절규를 합니다.

     

    하나님, 저게 숨 좀 돌릴 시간을 주십시오. 그 동안 내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슬픔과 고난과 질병 속에 살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지만, 남은 기간만이라도 한번 내 품꾼들처럼 마음껏 살고 죽게

     해주십시오.?

     

    이 말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품꾼들은 나름대로 마음껏 사는 것 같은데, 주인인 자기는 상상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려서 재산도 잃고 건강도 잃고 괴로움 가운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에게 행복했던 시간은 형편없이 적을 것 같습니다.

    스위스의 80노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

    적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살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더 살게 되면 제가 맘껏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죽을 자유도 없지 않습니까?

    살고 싶은 욕망은 고사하고 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습니까?

     

    죽을 수 있는 자유, 이 사람에게는 그런 자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고통의 질곡에서 헤어날

    수 없는 사람, 욥의 고백입니다. 한순간만이라도 마음껏! 살게 해달라는 것은

    오늘날 욥의 고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민일 수도 있습니다.

     

     

    고민의 종류는 다르지만 ,고통의 종류는 다르지만, 이런 고통과 고민을 걸머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우리도 욥처럼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한순간만이라도 저한테 자유를 주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이 생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게 해주십시오."

     

    사람에게 위기가 오거나 괴로움이 닥치면 반응하는

    방법이 각기 다릅니다.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인생관의 차이를 엿볼 수도 있습니다.

    역경에 부딪히고 어려움이 닥치면 제일 먼저 갖게 되는

    태도는 그 역경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도망자의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오면 괴로움을 피해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인지상정입니다. 괴로움을 즐겨하여

    그것과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도망갑니다. 멀리 도망만 갈 수 있다면야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역경은 도망치는 구석구석마다 따라옵니다.

    그리고 도망자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 그것은 우리의 바람일 뿐,

    계속해서 역경은 우리를 따라오고 괴롭게 합니다.

     

    도망치고 도망치다 안 되면 그 다음 방법을 생각합니다.

    그 다음 방법이라는 것은, 역경 가운데에 주저앉아 그냥 역경과

    더불어 사는, 그냥 적당히 맞추어서 사는,

    현상유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불의가 쫓아올 때 불의와 어울리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의가 찾아와서 이익을 건네주면 불의와 연합하는 사람,

    아예 불의와 단짝이 되여 도망자의 불명예를 면하고 현상유지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기쁨이 찾아오면 기쁨과 어울리고, 또는 슬픔이

    오면 슬픔에 어울려 한통속으로 살려고 하는

    현상유지 경향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도 합니다.

     

    지금 욥이라는 사람은 자기에게 닥쳐온 고난에서 도망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멀리 도망을 가도 질병은 따라옵니다.

    무슨 약을 먹어도 병이 낫지 않습니다.

    아무리 심리치료를 해본들 괴로움은 더할 뿐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어보면, 욥은 아예 주저앉아

    질병과 함께 고통 받고 죽자. 강도들이 와서 재산을

    다 빼앗아갔고, 자녀들은 몰살당했고, 건강마저 빼앗긴 이 상태. 아예

    하나님 앞에서 절규하면서 그냥 깔고 앉아 죽자.

     

    오늘 본문을 보면, 욥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러나 이렇게 주저앉아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순간만이라도

    저한테 자유를 주십시오. 이 지경을 벗어나서 한순간만이라도 마음껏 품꾼처럼

    자유를 누리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간구하는 가운데 욥은 깨닫는 게 있었습니다.

     

    ?역경이 닥치면 도망가는 것으로 인생의 문제를 풀 수는 없다.

    그냥 주저앉아서 불의와 역경에 적응하여 사는 것만으로

    인생의 의미는 없다. 그럼 어떡하면 되느냐?

    역경을 올라타고, 기어올라서 역경을 정복해야 한다.?

    샛말로 하면 정면승부를 말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즐기는 놀이 중에 파도타기가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올 때 두려워 도망갈 수도 있고,

    또는 파도가 너무 세서 파도에 휩쓸려 죽는 경우도 있겠지만,

    잘 훈련된 사람은 파도의 구비마다 파도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파도를 즐깁니다.

     

    그것은 역경이 닥칠 때 역경 아래에 매몰되지 않고,

    역경 위에 올라가 역경의 기복과 함께 역경을 타고 넘어

    인생을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가파르고도 힘든 산을 타면서 즐기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생활입니다.

    오늘 욥은 우리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역경을 타고 기어올라서, 역경 위에 우뚝 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버립니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역경과 좌절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도망자가 되고, 때로는 그냥 주저앉아서

    침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태를 벗어버리고

    한번 힘차게 산을 타고 올라가 보십시다.

     

    누가복음 18:1~18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어떻게 하면 파도를 잘 탈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이야기를 합니다.

    한 과부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 과부의 남편이 아마 빚을 진 채 남편이 죽자, 남편의 남은 빚을 갚으라고 어떤

    사람이 과부를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그 재판관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시 상황에서 보면,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사람이 아니고, 힘센 자 편에 서서, 먹을 것이 많은 쪽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람을 칭하여 말하기를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특히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야훼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인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도 두려워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게다가 그는 세상 사람들의 눈치도 보지 않는 사람,

    사람도 존중치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치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당시 사회에서 완전히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과부의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관이므로

    과부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에 대해 예수께서 답을 제시합니다.

    과부는 그 재판관이 불의한 줄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찾아가서 호소합니다.

    "재판관님, 제 권리만은 찾아주십시오"  

    상식적으로 볼 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재판관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비록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이렇게까지 나를 귀찮게 하니 내가 그의 권리를

    찾아주어야 하겠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살게 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녀자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시달리고 싶지 않아서라도

    이 여인에게 권리를 찾아 주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유대 땅에 제사장도 있고 율법교사도 있고 바리새파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인권과 생존권의 마지막 보루는 재판관에게 있을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험악하고 악한 세대라 해도 결국 판결은 재판관이

    내리므로 판결을 내리는 사람을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

    그런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인권의 보루는 재판관이므로,

    그 재판관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재판하든지 간에, 그를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말하시고자 하는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너희들의 하나님 아버지는 생선을 달라고 조를 때 뱀을

    줄 분이 아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아서 들어준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겠느냐?

    하나님은 장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귀머거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듣고 보고 자비하신 마음으로, 구하는

    이에게 그 구하는 것을 끝내 들어주실 분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만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합니다.

    내 괴로움을 살펴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호소해도 왜 안 들어주느냐고 따지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과부만큼의 끈질긴 믿음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분명히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에게?그래도 당신에게 매달리면 언젠가는 마음을 바꾸어서, 귀찮아서라도 내 뜻을 들어주겠지, 하고 붙들고 늘어지는 과부의 심정만큼 우리의 믿음이 강하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마지막 말씀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인자가 올 때 믿음 있는 자를 볼 수 있겠느냐?"

    이 마지막 질문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사람들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에게,

    이 과부의 심정으로 매달려 본 적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해 놓고 왜 안 주시느냐고 불평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유추해 보면, 욥의 호소는 과부의 호소만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믿음을 높이 샀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을 높이 산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손에서도 과부의 인권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서야 어찌 외면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졸랐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합니까?

    우리의 간구 속에는 얼마만큼의 절실함이,

    어느 정도의 진실이 배어 있습니까?

     

    과부의 믿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계획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복,

    그걸 아예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간구를 안 들으시는 것 같아서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판관도 그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만드는 과부의 열성, 이 열성이 우리에게 있는지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괴로움 앞에서, 도망가려는 비겁한 도망자가 아니라

    좌절과 고난을 타고 올라가 "하나님, 주십시오,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하고

    간구하는 끈질긴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마음껏 살아갈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 닥쳐옵니다. 날씨만 추운 게 아닐 겁니다.

    마음도 추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한번 간구해 보십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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